-연기생활 35년, 코믹 연기의 대가 임현식의 과거와 현재-
--레이디경향 2004.01.10 내용

"편모슬하의 독자였어요.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드라마 ‘대장금’ 출연자 중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코믹 연기를 선보이는 연기자가 있다. 어느 덧 연기생활 35년이 됐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는 시청자들의 웃음보를 자극하고 있다. 코믹 연기의 대가, 임현식이다.

‘한지붕 세가족’에서 환상의 파트너 박원숙 만나 1980년대 중반,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TV 앞에 앉았다.
만화영화 때문이 아니라 드마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드라마에 나온 세 가족의 이야기를 보고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 드라마는 참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흔히 주인공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계속 바뀌는데, 셋방에 사는 조연들은 드라마가 종영될 때까지 계속 출연했다.
만 7년 동안 주인공들은 바뀌어도 조연은 그대로 나오는 이상한 드라마는 MBC ‘한지붕 세가족’(1986~1994)이다.

이 드라마는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냈다. 흔히 주연들만 받았던 연기대상을 조연이 받은 것. 그 조연은 1990년 MBC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1991년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조연도 주연보다 더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줬다. 연기상을 받은 그 조연은 그 이후 드라마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감초연기로 우리들에게 친숙한 연기자가 됐다. 이 빛나는 조연은 연기생활 35년을 맞이한 ‘순돌이 아빠’ 임현식(58)이다.

‘한지붕 세가족’은 연기자 임현식을 각인시킨 작품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성공을 꿈꾸며 살아가는 순돌이 아빠는 ‘만물수리점’ 간판을 달고 가전제품 수리점을 운영했다. 서울 하늘에서 지지리도 어렵게 살지만, 바이올린도 연주할 줄 아는 낭만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남편을 들들 볶지만, 남편과 아들을 사랑하는 억척스런 어머니 역할은 박원숙이 맡았다. 그리고 지금은 뮤지컬 배우, 힙합 가수로 활동하는 이건주가 귀여운 순돌이 역을 맡았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부족한 이 집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시청자들을 웃게도 했고, 울리기도 했다. 덜렁대는 남편이 일으킨 사건을 해결하는 박원숙의 처절한(?) 연기에 함께 울었고, 세탁소집 만수 아빠와 순돌이 아빠의 싸움에 웃음을 터뜨렸다. 살이 포동포동하게 찐 순돌이가 보여준 자연스러운 연기에 놀라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일요일 아침마다 많은 시청자들을 TV 앞에 불러들였다.

"저에게 가장 소중한 드라마는 ‘암행어사’와 ‘한지붕 세가족’이에요. ‘암행어사’는 어사 이정길을 수행하는 갑봉이역으로 4년 반을 연기했고, 순돌이 아빠는 7년 동안 했으니까요. 두 작품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지붕 세가족’에서는 안 해본 연기가 없어요. 매주 주제가 바뀌는 옴니버스식이니까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겠어요. 연기자로서 완숙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정말 그때는 맘껏 연기했어요. 프로가 끝났을 때는 얼마나 서운했던지….”‘한지붕 세가족’을 통해 임현식과 박원숙이라는 환상의 커플이 만들어졌다. 마치 ‘전원일기’의 최불암·김혜자처럼. 두 사람은 지금도 전화도 자주하고, 밖에서 차도 함께 마시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하는 드라마에서는 눈빛만으로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가 됐다.

얼마 전, 박원숙의 외아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임현식은 장례식장을 찾아왔다. 힘들어하는 박원숙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통곡을 들어주는 임현식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친분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함께 나이를 먹어간 파트너죠. 모든 작품에서 함께 일할 수는 없지만, 쭉 함께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박원숙씨가 빨리 연기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잘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드라마 ‘암행어사’와 ‘한지붕 세가족’ 이후 임현식은 항상 서민적이고 코믹한 연기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드라마에 나오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웃음보가 터졌고, 드라마의 성공 여부는 그가 출연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1969년 MBC 공채 탤런트 1기로 데뷔한 임현식은 ‘빛나는 조연’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대장금’의 이영애, 후배지만 존경스러워‘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허준’ ‘올인’ ‘대장금’.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이 나왔던 작품들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감초 연기자 임현식이 출연했다는 것. 현대극과 사극을 오가면서 임현식은 드라마의 윤활유처럼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오묘한 표정, 그리고 예측불허의 대사들은 임현식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었다. 드라마 ‘허준’에서 눈을 위로 치켜뜨면서 외쳤던 ‘홍춘이~’나 대본에도 없던 ‘줄을 서시오’ 등 그는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30년 동안 함께 활동했던 김종학 감독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현식이형이 대본을 철저히 연구하면 대본과 너무 달라져서 걱정이고, 연구를 하지 않으면 대본과 너무 똑같아서 걱정이에요’라고 했어요.
김 감독의 이야기처럼 대본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현장에서 재미있는 대사가 나오질 않아요. 애드립이 현장에서 나오는 것은 30% 밖에 안 되요.
나머지 70%는 대본을 충실히 볼 때만 생겨요.”임현식은 연기자에게 ‘애드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카덴차(Cadenza)’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원래 카덴차는 ‘화려한 마침(Cadenza di Brabura)’이라는 뜻을 줄여 쓴 것이다. 작곡자가 일정 부분을 연주자의 즉흥 연주에 맡긴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요즘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는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그는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금보라와 함께 능청스러운 연기로 시청자들의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배가 거꾸로 거꾸러~ 간다’ ‘장그마이~’ 등은 그만이 할 수 있는 대사다. 시청자 게시판에도 임현식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극찬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유행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즉흥적인 대사를 사용하는 이유는 작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작품을 살리는 범위에서만 합니다.”임현식은 연출자로부터 애드립을 허락받는 몇 안되는 연기자 중의 하나다.
그만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즉흥적인 대사는 드라마의 분위기를 업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을 연출자들도 알고 있다.

임현식은 후배 이영애와 ‘대장금’을 통해 처음 드라마에서 만났다. 매회 대본 한 권을 거의 다 외어야 하는 어려움도 있고, 주인공으로 몸 관리를 철저히 해서 펑크가 나지 않도록 하는 이영애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이)영애 보면 정말 이쁘고, 대견스러워요. 후배지만 존경스러울 때도 많고. 영애에게 이 작품은 가장 힘들지만,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으로 남을 거예요.”어느덧 촬영 현장에서 임현식은 가장 고참급 연기자가 됐다.
인사를 할 때보다 인사를 받을 때가 훨씬 많아진 것.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단역으로 시작한 연기생활이 벌써 35년이 됐다. 무명 시절 연기만으로 밥벌이가 어려울 것 같아서 농장일을 시작했던 때도 ‘개가 벼룩 털 듯 어려움은 금방 잊어버린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만이 가득해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가슴에 사무친 아픔이 있다. 3년 전,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가장 큰 충격받아"편모슬하에서 자랐어요. 어머니는 저밖에 모르셨고, 평생 함께 살았죠. 그러다가 3년 전, 집에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아무런 말씀도 못하시고 6일 만에 돌아가셨거든요. 정말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당시 임현식은 KBS-TV 시트콤 ‘멋진 친구들’을 포함해서 드라마 3편에 출연중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 때문에 몸에서는 열이 솟구치는 힘든 상황에서도 평상시처럼 연기를 했다. 방송국에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지만, 병원에 갈 때는 가슴이 답답했다. 당시를 회상하면 ‘무당 기’가 있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한다. 지금도 좋은 일이 생기면 어머니가 생각나 혼자 드라이브를 하는 때도 많다.

어머니는, 공부는 못하고 호기심 많은 자식 임현식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아들에게 일이 생기면 친가나 외가쪽 친척이랑 함께 상의해가면서 아들 기를 꺾지 않도록 많이 도와주셨다. 바이올린도 배우고, 성악 공부도 했던 자식이 종합예술인이 되겠다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할 때도 어머니는 지켜봐주셨다. 학력고사 체력장 시험을 볼 때도 전남 광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행여 다칠까, 무슨 일이 생길까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려 준 어머니였다.

이런 극진한 사랑을 받은 때문인지, 임현식의 자식 사랑은 방송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서는 코믹한 연기의 대가지만, 가정에서는 예절 교육을 엄하게 시킨다. 어른에 대한 예절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것들을 자식들에게 강조한다. 딸 셋은 모두 잘 자라주었다. 그는 딸 이야기를 할 때 넘치는 행복을 숨기지 않는다.

"큰애는 25살인데,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해요. 둘째랑 막내는 쌍둥인데, 하나는 졸업반이고, 하나는 항공사에 취직했어요. 애들 모두 스스로 잘 커줘서 별 걱정 없이 지냈어요. 하지만, 이제 애들이 다 커서 저를 섭섭하게 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어머니도 저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셨겠구나라고 느낀다니까요.(웃음)”임현식은 요즘 「장길산」을 다시 읽고 있다. ‘대장금’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그는 책을 사랑하는 배우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것을 아는 배우다. 몇 년 전에는 1천5백여 페이지나 되는 「레 미제라블」을 읽기도 했다. ‘장 발장’ ‘밀리에르 신부’ ‘코제트’ ‘자베르만 경감’ 등의 캐릭터를 연구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며 웃는다. 바이올린은 연주할 틈이 없다며 아쉬워한다.

흔히 사람을 웃기는 연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연기자 임현식은 타고난 코믹연기의 대가다. 과장되어 보이는 연기도 그가 하면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단역부터 시작해 그는 자신만의 자리를 확고하게 잡았다. 여배우와 멋진 러브 신이 없어도, 눈물 펑펑 나게 하는 슬픈 연기가 없어도, 우리는 임현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웃음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지호영